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드라마 때문에 밤잠을 설쳐봤을 것이고, 화를 내면서
인터넷 홈페이지에 '얘 좀 죽이지 말아주세요!'라며 글을 남겨도 봤을 것 같다. 우리
들에게 드라마란 뭘까. 허구헌날 같은 놈들이 나와서 같은 스토리를 늘어놓더라도
그 속에서 색다른 매력을 찾아내고, 즐기는 것. 그래설까 적어도 내게 드라마는 카
타라시스다. 예쁜 여자가 등장하고, 멋있는 남자가 등장한다. 여러가지 방해요소들
이 있지만 결국 나의 '그들'은 사랑을 이룬다. 혹은 이루지 못하더라도, 너무나 비장
하고 아름다운 OST 음악과 함께 죽음으로 장식돼 준다. 깨끗하게, 쿨하게.
그런데 나로서도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은 제대로 상상해본 적이 없는 개념이다.
작가니 연출..을 고려해가면서 드라마를 볼 만큼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드라마가 재미있으면 재미있나보다, 재미없으면 재미없나보다 생각하고 넘어가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 사람들은 뭐 저렇게 진지하지. 시청률을 따지고, 내용을
따지고, 철학, 재미, 카메라, 동선, 연기,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변수들을 생각해가면
서 드라마에 대해 왈가왈부. 그런데 뭐라고 할 수 없는 건, 바로 저 사람들 손에서
내가 보는 드라마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게, 그들의 세상, 드라마국인 거다.
그들은 대부분-_-; 이랄까 전부..이겠지. 한국 유수의 대학(이래봤자 실질적으로는
죄다 S동창일 거라고 생각되지만.)을 졸업하고, 다른 직장을 버려두고 살인적인 경
쟁률을 뚫고 기어이 드라마국에 입성..했는데 어째 생각했던 것보단 쉽지 않은 듯.
첫화부터 방송 사고 위험에 처하지 않나. 너무 재수없고 짜증나는 놈인데 능력만은
누구보다 괜찮아서 욕할 수도 없는
▲ 바로 이 사람 때문에 이래저래 억울한 사연을 겪질 않나. 때로는 불여시가 따로
없다 싶은 노장 배우에게 이리저리 휘둘려 복장이 터지기도 한다.
△ 이 사람 말이다. -_-;;
아쉽게 캡쳐를 못했는데 내가 너무 사랑하는 조연...출 '김민희'이라는 캐릭터의 입
에서 '여자 몸으로 연출하기가 젠장 힘들다'는 하소연을 듣고보면 무릎을 칠만 하
다. 이 드라마를 보고 갑작스레 장래희망을 바꿀까 고려중이던 내게도 쓰라린 말들.
화장실을 참다참다 병에 걸리기가 일쑤고, 며칠 잠 못 자는 건 기본. 여름에 혹시 생
리라도 하게 되면 여기저기 뛰어다니랴 땀을 하도 흘려서 엉덩이가 짓무르고 땀띠가
난다..는 말들. 화려한 '그들의 세상' 역시 그 속엔 여러가지 어두움들이 있었던 거구
나. 생각하면서 두큰두큰하다.
▲ 세상에 쉽게 되는 일이 있을 것 같지? 라고 묻는 듯한 드라마국 뒤처리 담당 정
지오 씨.
세컨드 키워드, '사랑'
'그사세'의 러브 라인은 촘 다양하다. 제일 선명하게 보이는 주인공 라인이 주준
영-정지오 라인. 초반에 잠깐 등장했던 '옛애인'들도 알고보면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젠틀한 의사 강준기 씨. 구질구질하게 길고 긴 관계를 이어왔..던 과
거의 첫사랑 이연희 씨. 두 사람의 사랑은 이 '과거'를 털어낸 후에야 비로소 윤
곽을 드러낸다. 알고보니 지들도 과거의 연인(....)이어서 나를 당황케 했지만.
▲ 옛 사랑을 잊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조금씩 성숙해진다. 그리고 그 사랑을 잊
어갈 때쯤 새로운 사람에게 매력을 느낄 것이고, 그 다음의 사랑은 더 잘해보자고
다짐한다. 평생토록, 영원토록 사랑하고 싶단 건 드라마적인; 욕심이지만, 적어도
더 열심히 해 보자고.
그러고보면 그사세에서 다루는 사랑은 확실히 좀 현실적이다. 솔직히 뭐, 사랑을
안해본 나로서 현실이 어떻고 저쩧고 말할 수 없는 건 확실하지만, 적어도 어떤 느
낌이 '현실적'인지 말할 자격은 있는 거다. 그런 점에서 그사세의 사랑은 조금 더
쿨하고, 모던하다.
▲ 이제까지는, 이지만 둘이서 뭔가 비싸보이는 레스토랑까지 가서 비싼 와인을 마
시거나 하지 않는다. 집으로 데리고 와서, 편한 자세로 술을 마신다. 집이 좋아서 그
런가(...). 그치만 얼추 생각해도, 편한 사이라는 가정 하에서 그 많은 레스토랑 비가
아깝지 않을거란 생각은 안 듬. 이런 것도 리얼리티의 한 축에 넣자.
△ 오랫만에 맞은 달콤한 휴가. 넓~은 집을 마음껏 더럽히면서 비디오를 보고, 만
화책을 보고 놀다가, '더 이상 못 참겠어!'라면서 청소기를 들고 일어선 남친에게
업혀서 '어, 여기 먼지~'라고 짚어주는 사랑사랑사랑스러운 여성 혜교!
아 정말.. 여자가 봐도 사랑스럽고 귀여운 여자 주준영.
△ 귀엽지 않아여?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신경질적이고 짹짹대기 잘하지만 정지오 앞에서는 좀 지나치게 사랑스러움. 뭘 막
잘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화내기는또 얼마나 좋아하는지, 뭔가 조금만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도 즉시 삐쳐버리는 캐릭터. 바락바락 따지길 좋아하고, 반면 약점을
잡히면 어떻게든 피하려 든다. 뺀질댄달..까. 어떨 땐 어른스럽다 싶은데
▲ 가령, 이런 눈으로 연인을 바라볼 때.
△ 혹은 지금처럼, 제법 철든 얼굴을 하고 정지오의 말을 듣고 있을 때.
어떤 경우엔 얘 좀 철이 없네, 싶다.
△ 보통 이런 얼굴을 하고 마음에 안 드는 일을 끝까지 따지려 드는 주준영. 아이
스럽달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 것 같다. 그러니까 남성우월주의가 판을 치는 드
라마 국에서 저정도의 입지를 차지한 거겠지만 말임.
▲ 마지막으로 내가 너무 좋아하는 포옹씬. 그사세를 보면서 새삼스레 연출의 중
요성을 느낀다. 하늘 색깔도 구름 모양도 너무 이쁘고, 이 장면의 맥락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이쁘다.
두 번째 라인..은 물론 김민철 국장-윤영이 보여주는 중년의 사랑이겠지만, 이 부분
에 대해서는 아쉽게 캡쳐가 없어서 말로 대신하겠음. 드라마 초반에서 정지오-이연
희의 관계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을 때, 김민철 국장의 끈질긴 첫사랑은 정지오가
보이는 태도와 대조된다. 말하자면, 김민철 국장이 첫사랑을 어떻게든 이루려 한다
면 정지오는 지금 와서 첫사랑을 뒤로 하려는 입장이니까. 나이차를 생각하면 왜 저
렇게 친한지 이해가 잘 안 되는 김민철 국장-정지오는 이 문제로, 뭐 별로 대단한 건
아니지만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어쨌거나 정지오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연희에 대
한 자기 마음을 없게 하고 싶은 거잖슴.
참고로 나는 준영이 지오에게 연희와의 만남에 대해 캐물을 때
△ 이런 표정으로 두 사람이 비오는 날 만나는 꼴;을 보고 있었던 준영.
지오가 취했던 태도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지금 애인이랑 옛 애인 얘기하는 거
별로 싫다. 해봤자 뒷담화로 갈 수밖에 없잖아.' ....T^T... 이 대사를 어디서 봤더라,
라고 생각해버렸다. 쿨함이 트렌드가 된 요새 세상에 이 정도 대사야 뭐 흔한 거겠
지만, 역시 현빈 입에서 나오니 느낌이 틀리달까.
....또 준영-지오로 가버렸는데, 하고 싶은 말은 대충 이렇다.
아직 이 부분에 대해 줄거리가 구체화되지 않은 만큼, 섣불리 두 사람의 향후 관계를
예단하려는 건 잘못하는 일일 것 같다. 내 순진한 바람대로라면 힘들 때마다 곁에 있
어주는 사람, 변하지 않는 사람인 김민철 국장에게 윤영이 마음을 더 주면 안 될까.
곁에 머물러주면 안될까 싶기도 하지만, 이제까지 윤영이 보여줬던 성격으로 봐서 그
그렇게 되는 쪽이 배신 아닐까 싶기도. 아 그렇다면 김민철 씨는 죽을 때까지 윤영이
남자 갈아타는 꼴을 지켜봐야 하는 건가. 그것도 또 머리가 아프다.
그들의 관계는 명백히 한쪽(김민철 국장)이 밑지는 쪽으로 보이지만, 알고보면 박현
섭 국장이 말하는 대로 윤영이 마음이 더 불편할 지도... 향후가 궁금해지는 라인임!
마지막..이 맞나, 아니라도 마지막이지만, 이 라인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연기력
에 있어서 확실히 좀 많이 부족하지만, 서효림..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배우는 왠지
밝고 명랑하고 철없는 애 장해진 역에 딱 맞는다 싶다. 굳이 짚자면
▲ 이런 미소들 때문에. 아쉬운 점을 고르라면 제발 미소는 미소로만. 억지로 짓지 말
아줬으면 좋겠다. 연기자로서의 그녀는 신인..인가 못들어본 애긴 한데, 어쨌거나 연
기가 아직 부족하다 싶다. 다시 드라마로 넘어가면 뭐, 사실, 얘에 대해서는 아직 정체
를 가늠할 수가 없달..까. 어쨌거나 그녀의'감독님'은 평소에도 바람둥이로 유명한 사
람일텐데, 대본 연습이고 지랄이고 밤늦게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간다는 건 뭐지.
내가 너무 보수적인 걸까. 아니면 얘가 혹시 정체를 감춘 불여시? 그런데 그런 식으로
설정된 캐릭터는 어쨌거나 아닌 것 같기 때문에. 좀 헷갈린다. 귀추를 지켜봐야 할 듯.
그런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능력이야 좀 좋을지몰라도 왕싸가지에 재수없기로 소문
난 드라마국 왕따 손규호 씨가 너무너무 좋다. 대체 왜지a 사실 이 사람의 어느 부분
도 내 이상형인 남자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그에게는 달리 대단한 고뇌가 있
을거라고 생각되지도 않지만, 그냥 나는 이 속물 캐릭터가 마음에 든다. 아버지와 관
련된 사연이 드러날 게 분명한데, 솔직히 말하면 그런 짓 하지 말고 그냥 내 사랑 손
규호 씨를 그대로 뒀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렇기 때문에 이 상큼발랄한 미래 대배우
의 접근(?)이 좀 못마땅할 수밖에 없는 거다.
△ 근데 아무리 잘 봐 주려고 해도 별로 잘생긴 얼굴은 아니다.
라스트. '그사세만의 매력!'
퍼스트, 세컨드를 써가면서 포스팅을 써온 만큼 적어도 서드까지는 써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더 이상 뭘 써야할지 모르겠음. 그사세의 명대사에 대해서는 나도 인
정..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꼈다. 그런데 그 '느낌'을 일일이 다시 듣고, 정리하고,
혹은 다른 사람 블로그에서 긁어와서 내 것처럼 하는 게 귀찮고 싫다. 여기까지 보
고도 드라마를 보고픈 마음이 있다면, 참고할 것. 그사세는 대사 한 줄 한 줄이 명
대사인 드라마다. 그게 좀 특별한 이유가, 「프라하의 연인」에서 욕먹었던 식의
명대사랑은 다르다. 프라하에서 명대사가 대부분 느글느글한 사랑 이야기, 같은 상
황이라도 얘네 좀 오버하네 싶었던 과도한 명대사의 물결.. 이었다면 그사세의 명
대사는 조금 더 차분하다. 그리고 현실적이다.
솔직히 드라마 아닌 현실에서, 사람들은 그런 말 잘 안 한다. 예를 들어 '넌 내 여자
야!' 라는 말. 드라마에선 너무 흔한 소리지만, 현실에서 그런 말이 입에나 떨어지나
함 보자!!!!!!
그런 의미에서 그사세의 명대사-대부분 내래이션으로 이루어져있는-는 언젠가 나
도 말해보고 싶은, 일기에 베껴 적고 싶은 섬세함과 차분함들이 가득하다. 그런 리
얼리티들이 모여 그사세를 더 모던한, 세련된 드라마로 만들고 있는 거라고 생각
한다.
또 다른 장점..이랄까 쿨함을 들어보자면, 얘는 뭔가 '강요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
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좀 쉬어가고, 참는다. 드라마를 보면서 그런
부분들을 채워나갈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다. 가령 정지오가 맨날 늘어놓는 '드라마
론'은 아직 별로 구체적이지 않다. 그가 원하는 드라마가 오직 생계유지를 위한 수
단인지, 엄마를 기쁘게 해주기 위한 오락적 성격의 드라마인지, 아니면 그가 좋아하
는 철학이니 뭐니(...)를 가득 버무린 진지한 드라마인지. 사실 그 모두일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쨌거나 그가 만드는 드라마 스타일은 그 중 하나이겠지. 혹은
그러고 싶을 거다. 세상 누가 작품을 만들면서 '내 작품은 짬뽕이 컨셉이야'라는 생각
을 하겠어. 그런데 그 부분을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는다. 절제. 은근슬쩍 넘어감. 이
런 것들이 내 상상의 나래를 좀 더 넓혀주고 있는 것 같다.
끗.